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타이라노 마사카도 (문단 편집) === 요시카네와의 격돌 === 마사카도가 돌아온 뒤 다시 다이라노 요시카네는 마사카도를 공격해 마사카도가 관리하던 국영목장 쓰네하네노 미하야(常羽御厩)를 쳤다. 이 싸움에서 마사카도는 패하여 도망치고, 마사카도의 처자[* 요시카네의 딸과 외손자였다.]는 요시카네에게 잡혀갔다. 하지만 요시카네의 다른 아들들인 기미마사(公雅)나 기미쓰라(公連)의 도움으로 마사카도의 처자는 탈출해 마사카도에게로 돌아왔고, 처자가 돌아온 것에 힘을 얻은 마사카도는 조정, 후지와라노 다다히라에게 요시카네의 악행과 자신의 정당성을 호소했는데, 조정에서는 마사카도가 관리하고 있던 국영목장이 요시카네 등에게 공격받은 것에 더 무게를 두어 11월 5일에 다이라노 마사카도에게 다이라노 요시카네나 사다모리, 미나모토노 마모루 등을 치라는 태정관부(太政官符)를 보내왔다. 이를 계기로 마사카도는 본거지를 도요타에서 이시이로 옮기고, 이시이를 야습해온 요시카네의 군사를 격파하고 쓰쿠바(筑波) 산으로 내몰았다. 이 패전 뒤 요시카네의 세력은 급속히 약해져, 결국 3년 만에 요시카네는 병사했다.[* 이 무렵까지도 일본 조정은 마사카도와 그의 적대자간 싸움은 어디까지나 사전(私戰), 즉 호족들 사이 개인적인 다툼으로 여기고, 국가나 조정에 대항하는 반란이라고 보지는 않았다. 오히려 조정은 다이라노 마사카도라는 인물이 얼마나 동쪽에서 위용을 얻엇는지 알고 나서는 그를 이용해 동쪽을 효율적으로 통치하려고 했다.] 한편 요시카네가 죽기 1년 전인 조헤이 8년(938) 2월에, 몸둘 곳이 없게 된 다이라노 사다모리는 도산도를 거쳐 교토로 가려 했지만, 사다모리가 자신을 조정에 고소할 것을 걱정한 마사카도는 1백 기를 거느리고 이를 추격해 시나노의 치쿠마 강에서 양자 간 전투가 벌어졌다. 사다모리는 대부분의 병력을 잃고 간신히 몸만 빠져나와 교토로 도망칠 수 있었는데, 교토 조정에 마사카도의 난폭함을 호소한 사다모리는 조정이 마사카도에게 내린 소환장을 가지고 도고쿠로 돌아와 히타치노스케(常陸介)[* 히타치와 가즈사, 고즈케 3개 구니는 친왕임국(親王任國)이라고 해서 최고 장관직인 카미(守)를 친왕이 맡지만, 친왕들은 막상 실제 부임은 하지 않음으로써 카미 밑의 차관인 스케(介)가 실제 현지에서의 최고 지배자를 맡았다. 훗날 마사카도가 신황을 선포하고 나서 자신의 형제와 측근들을 간토 지역의 지방관으로 임명하는데, 고즈케에는 카미를 둔 것에 비해 히타치와 가즈사에는 그냥 예전대로 스케를 최고 지방관으로 두고 카미를 임명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사카도가 정말 기존의 조정과는 다른 새로운 나라를 세울 생각이었다면, 굳이 기존의 교토 조정에서 하던 관습을 답습할 필요가 있었느냐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이에 대해서는 아예 다 갈아엎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경우에라도 기존의 제도를 완전히 없애지는 않고 거의 답습하는 경우도 많다는 점이나, 히타치와 가즈사를 따로 지방관에게 맡기지 않고 마사카도가 신황 자신의 직할령으로 직접 지배하려고 했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후지와라노 고레모토(藤原維幾) 편으로 그 소환장을 마사카도에게 보냈지만 마사카도는 이에 응하지 않았고, 무쓰(陸奧)로 도망치려던 계획마저 마사카도에 의해 수포로 돌아간 사다모리는 마사카도에게 쫓기면서 도고쿠를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 덴교(天慶) 2년(939) 2월, 무사시 국에 새로 부임한 곤노카미(權守) 오키요 왕(興世王)[* 곤노가미는 말 그대로 카미가 올 때까지의 대리직. 후술하겠지만 이 사람이 사태의 원흉이라고 봐도 무방하다.]과 스케 미나모토노 쓰네모토(源經基)[* 세이와 겐지의 시조로 훗날의 무가 겐지의 시조이기도 하다. 쇼몬키는 이 두 사람의 행태, 지방에서의 온갖 착취 및 수탈 행위를 한 쌍의 [[젓가락]]으로 은유했을 정도.], 그리고 아다치 군지(足立郡司) 무사시노 다케시바(武藏武芝) 사이에 벌어진 양자간 갈등[* 쇼몬키에는 부임해 오자마자 무사시 관내를 시찰하겠다는 오키요 왕에게 "아직 정식 카미가 오지도 않았는데 임시직에 불과한 사람이 지방을 시찰하는 그런 전례 같은 거 없거든요?"라고 다케시바가 막아서자 "군지 주제에 건방지게"하면서 오키요 왕이 다케시바를 친 것이라고 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오키요 왕이 미리 수령으로써 뭔가 우려내 먹을 거 없나 하고 준비한 계획이었다는 해석이 대부분이다.]에 마사카도가 중개에 나서서, 오키요왕과 다케시바를 대면시켜 서로 화해하게 했는데, 다케시바의 군사가 갑자기 쓰네모토의 진영을 포위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이유는 불명), 놀란 쓰네모토는 교토로 도망쳐서 다이라노 마사카도와 오키요왕, 무사시노 다케시바가 반란을 꾀하고 있다고 조정에 고발했다. 그러나 마사카도는 다시 히타치ㆍ시모우사ㆍ시모스케ㆍ무사시ㆍ고즈케 다섯 구니의 관아에서 나서서 작성한 "모반은 사실무근"이라는 연판장을 첨부해 보냈다. 이로써 조정은 마사카도의 혐의를 풀었고, 반대로 쓰네모토가 무고죄로 처벌받았다. 그런데 오키요 왕은 새로 무사시노카미로 부임해 온 구다라노 사다쓰라(百濟貞連)[* 성씨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백제왕자 부여선광의 후손이라고 한다.]와의 불화로 임지를 떠나 마사카도에게 의지해 왔고, 또한 히타치의 호족으로서 부동창[* 전쟁 등을 대비해 마련해 둔 비상용 창고.]을 부순 혐의로 추포령이 내려져 있던 수배자 후지와라노 하루아키(藤原玄明)가 비호를 요구해오자 마사카도는 받아주었다. 히타치 관아에서는 마사카도에게 하루아키의 신병 양도를 요구했지만 마사카도는 "하루아키는 이미 도망쳤다"며 거절하고, 오히려 덴교 2년(939) 11월 21일에는 병사를 모아 하루아키에게 떨어진 추포령을 철회할 것을 히타치 관아에 요구했다.[* 사실 이 부분은 마사카도가 너무 막나갔다고 볼 수밖에 볼 수 없는 것이, 조정의 관리로써 엄연히 조정의 법을 어긴 죄인을 잡겠다는데 그걸 숨겨준 것도 모자라 잡지 말라고 한 것이다.] '''히타치에서 --당연하게도-- 이것을 거부하더니 마사카도에게 선전포고를 했고,''' 마사카도는 1천여 군세로 히타치 관군 3천 군사를 단번에 격파했다. 히타치노스케 후지와라노 고레모토는 싱겁게 항복해버렸고, 히타치의 관아를 접수한 마사카도는 수령의 인일(印鎰)[* 인은 수령으로서의 직책을 상징하는 도장, 일은 관아의 창고의 열쇠다.]을 몰수했다. 이 사건은 정말 빼도 박도 못할 '반역'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